우에스기 쓰나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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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쓰나카쓰는 요네자와 번의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아들로, 164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에도 성 성벽 공사 명령으로 재정난을 겪었으며, 영내의 크리스천 탄압을 강화했다. 1664년 후사 없이 사망했는데, 사인에 대해서는 독살설과 위궤양에 의한 병사설이 제기되었다. 가문은 그의 장인 호시나 마사유키의 중개로 조카인 우에스기 쓰나노리가 계승했지만, 영지를 몰수당해 고쿠다카가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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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쓰나카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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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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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
요네자와 번 다이묘 | 3대 |
재임 시작 | 1645년 |
재임 종료 | 1664년 |
이전 영주 | 우에스기 사다카쓰 |
다음 영주 | 우에스기 쓰나노리 |
출생일 | 1639년 1월 25일 |
사망일 | 1664년 6월 30일 |
아버지 | 우에스기 사다카쓰 |
배우자 |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하루히메 |
개인 정보 | |
본명 | 우에스기 쓰나카쓰 (上杉綱勝) |
어릴 적 이름 | 우마쓰 |
개명 | 실승 → 강승 |
통칭 | 기헤이지 |
계명 | 상성원영심 (上性院瑛心) |
관위 | 종4위 하, 하리마국 수, 시종 |
씨족 | 우에스기 씨 |
부모 | 아버지: 우에스기 사다카쓰, 어머니: 생선원(고노에 가 가신 사이토 모토모리의 딸) |
형제자매 | 도쿠마쓰 쓰나카쓰 구니마쓰 도쿠히메 (조마쓰인, 마에다 도시하루의 정실) 도라히메 (류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의 정실) 가메히메 (호센인, 마에다 도시야키의 정실) 미히메 (기라 요시나카의 정실) |
배우자 | 정실: 호시나 마사유키의 장녀, 히메히메 계실: 요쓰쓰지 긴미치의 딸, 도미히메 |
양자 | 우에스기 쓰나노리 |
무사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번 | 데와국 요네자와 번 번주 |
묘소 | 불명 |
2. 생애
우에스기 쓰나카쓰는 요네자와 번의 2대 다이묘인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아들이었다. 처음 이름은 "우에스기 사네카쓰"였지만,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한자를 받아 "쓰나카쓰"로 이름을 바꾸었다.[2] 164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나, 1649년 에도성 해자의 석벽을 수리하는 과제를 부여받아 영지의 재정이 파탄났다. 새로운 토지 측량을 통해 증세 능력을 향상시키려 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1651년 종4위 하위, 주니어 등급의 조정 관직과 지주(Jijū)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영지는 키리시탄 칙령 시행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쇼군의 비판을 받았고, 야마우라 미쓰노리가 이끄는 우에스기 가문의 방계 가문이 키리시탄 혐의로 사형당했다.[2]
1654년, 쓰나카쓰는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하루히메와 결혼했으나, 1659년 하루히메는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시어머니 쇼코인(1620–1691)이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퍼졌다.[3]
1664년 쓰나카쓰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는 영지 몰수 사유가 될 수 있었으나, 호시나 마사유키가 사후 입양을 성사시켰다. 쓰나카쓰의 여동생은 키라 요시나카와 결혼했는데, 그들의 장남(쓰나카쓰의 조카)이 입양되어 우에스기 쓰나노리로서 우에스기 가문을 이었다. 쓰나카쓰는 여동생을 방문하여 키라 요시나카와 저녁 식사를 한 다음 날 밤에 병이 났는데, 공식 역사에서는 천공성 궤양을 앓았다고 하지만, 사망하기 전 7일 동안 독살 증세를 보였다. 충신장 사건으로 키라 요시나카를 악당으로 여기는 여론 때문에 그가 쓰나카쓰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에도 시대 중반까지 유통되었다. 쓰나카쓰의 사망으로 요네자와 번은 고쿠다카가 30만 고쿠에서 15만 고쿠로 감소했고, 잃어버린 15만 고쿠는 무쓰국 시노부 지역과 데와국 오키타마 지역 일부로, 호시나 마사유키가 관리하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번주 즉위
간에이 15년(1639년) 12월 22일 요네자와번의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사네카쓰(実勝)였으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한자를 받아 쓰나카쓰(綱勝)로 개명했다.[2] 쇼호 2년(1645년), 아버지 사다카쓰가 사망함에 따라 번주직을 계승하였다. 조오 2년(1653년) 종4위하 시종(侍従)에 임명되고, 하리마노카미(播磨守)를 겸임했다.2. 2. 통치와 재정난
게이안 2년(1649년), 에도 성 성벽 공사 명령을 받아 번 재정이 악화되었다.[2] 영지 내 개척지의 토지 조사 등 공조 제도 정비를 추진하였다.[2] 게이안 4년(1651년), 모시 검지(青苧検地|아오소 검지일본어)를 시행하여 번의 매상 총액을 530자루로 하였다.[2] 메이레키 3년(1657년), 납방신장(納方新帳|납방신장일본어)을 편성하였다.[2] 영내 크리스천 탄압을 강화하여, 조오 3년(1654년)에는 에도 막부 로주의 명에 따라 일문(一門)인 야마우라 미쓰노리 등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2]2. 3. 결혼과 후계 문제
만지 2년(1659년), 호시나 마사유키의 맏딸 하루히메(媛姫|원희일본어)가 19세로 사망하자, 쓰나카쓰는 계실(繼室)을 맞이했다.[3] 그러나 간분 4년(1664년)에 후사도 없이,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않은 채로 급사하고 말았다.[2]원칙대로라면 우에스기 가문은 후사가 없어 단절될 터였으나, 쓰나카쓰의 장인 호시나 마사유키의 중개 등으로, 쓰나카쓰의 동생 도미코(富子|도미코일본어)의 남편인 기라 요시히사의 맏아들 우에스기 쓰나노리를 말기양자로 들여 쓰나카쓰의 뒤를 이음으로써 가문 존속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때 시노부 군과 오키타마 군의 영지 일부를 몰수당하여, 요네자와 번의 고쿠다카는 30만 석에서 15만 석으로 감소했다.
3. 사인(死因)
쓰나카쓰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천공성 궤양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라 요시히사에 의한 독살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쓰나카쓰가 기라 가문을 방문한 직후 병에 걸렸고, 그 증상이 독살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쓰나카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요네자와번은 고쿠다카가 30만 고쿠에서 15만 고쿠로 줄어드는 어려움을 겪었다.
3. 1. 독살설
쓰나카쓰의 사인에 대해서는 기라 요시히사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쓰나카쓰가 동생의 시집인 기라 가를 방문한 직후에 발병하였고, 그 증상이 독살에 의한 것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우에스기 가의 에도 가로 지사카 다카후사의 〈삭봉일기〉에는 복통과 구토 등 쓰나카쓰의 증상이 상세히 나와 있다.[4] 하지만 그 증상만으로는 식중독인지 독살인지 의학적으로 판별하기 어렵다고 한다.[5]〈삭봉일기〉에 기록된 쓰나카쓰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4]
날짜 | 증상 |
---|---|
윤 5월 초하루 | 밤부터 복통을 호소, 핫토쿠엔 복용 후 날이 밝을 때까지 7~8번 구토 |
2일 밤 ~ 3일 밤 | 막부 의사 우치다 겐쇼가 치료 |
4일 | 복부가 부풀어 오르는 증상, 이노우에 겐테츠와 야마시타 유사이가 치료했으나 호전 없음 |
5일 | 구토 증세와 함께 팥 삶은 물 같은 것을 토함, 쇠약함이 심해짐 |
6일 낮 | 침상에서 대변을 세 번 봄, 밤부터 손발이 차가워지고 맥에 이상 발생 |
2일 ~ 6일 | 숭늉을 올림 |
7일 묘시(오전 6시) | 사망 |
〈야마가타현사〉에서는 쓰나카쓰의 사인을 천공성 위궤양으로 추정하고 있다.[5] 또한, 쓰나카쓰는 이전부터 병약하여, 이이 나오타카 등이 우에스기 가문 후계자로 호시나 마사유키의 아들 마사즈미를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
3. 2. 기타 사인
〈야마가타현사〉에서는 쓰나카쓰의 사인을 천공성 위궤양에 의한 병사로 추정하고 있다.[5] 쓰나카쓰는 이전부터 병약하여,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에 따르면 만지 연간에도 위독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4.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우에스기 사다카쓰 |
어머니 | 쇼젠인 - 고노에가 가신 사이토 모토모리의 딸 |
정실 | 하루히메 - 호시나 마사유키의 장녀 |
계실 | 도미히메 - 요쓰지 사네노리의 딸 |
양자 | 우에스기 쓰나노리 - 기라 요시나카의 장남 |
5. 평가
쓰나카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영지 축소는 당시 요네자와 번의 정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쓰나카쓰 사후 영지 축소 과정에서 번사들의 해고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재정난이 더욱 심화된 점은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쓰나카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그 이후의 권력 암투는 훗날 충신장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등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참조
[1]
문서
四辻公理は[[四辻公遠]]の孫であるので、綱勝とは[[はとこ|またいとこ]]同士でもある。
[2]
문서
偏諱の授与は米沢藩主として初である。
[3]
서적
会津松平家譜
[4]
서적
山形県史 資料編16
[5]
서적
山形県史 通史編第二巻、68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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